
해외에 한국을 알리는 동영상들을 보면 반드시 나오는 것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탈춤입니다. 사실 탈춤은 정확한 용어가 아닙니다. 가면을 쓰고 일종의 연극을 하는 것이니 ‘가면극’이라고 해야겠죠. 그러나 1970년대에 대학가에서 가면극보다는 탈춤이라는 이름으로 대대적으로 연행되면서 이 용어가 더 친숙해졌습니다. 탈춤은 노래와 춤, 연극, 의상 등 여러 면을 종합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민중예술을 대표하는 장르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런 대표성이 있기 때문에 1970년대에 젊은 대학생들의 사랑을 받은 것 아닌가 싶습니다. | |

탈춤은 노래, 춤, 연극이 어우러진 민중을 대표하는 예술 중 하나이다.
궁중 광대들의 춤으로 시작하여 민중 문화로 확장

여러분들은 어떤 탈춤을 알고 있나요? 아마도 하회 마을에서 아직도 절찬리에 공연되고 있는 하회 탈춤이 가장 많이 알려진 탈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하회 춤은 마을굿이나 서낭굿을 할 때 추던 대표적인 춤입니다. 이 춤은 전문적인 춤꾼들이 아니라 그 마을의 주민들이 추던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마을굿과는 관계없이 장이 열리는 시장 같은 데에서 연행되던 탈춤도 있었습니다. 봉산 탈춤이나 고성 오광대 등이 그 대표적인 춤인데 이런 탈춤은 대체로 세 지역에서 공연되었습니다. 우선 봉산 탈춤이 가장 대표적인 춤으로 되어 있는 서북의 황해도 지방 탈춤이 있고 양주 별산대 놀이가 대표적인 춤으로 되어 있는 중부 지방의 탈춤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상도 지방에는 고성 오광대나 부산의 동래 야류(野遊)와 같은 탈춤이 있습니다. | |
그런데 이 세 지역의 춤이 지닌 내용이 매우 흡사합니다. 조금씩 다른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탈춤이든 양반을 사정없이 능멸하는 과장과 파계한 승려를 놀리는 과장, 그리고 첩을 둘러싸고 생기는 부부 간의 갈등을 그린 과장은 반드시 포함되지요. 그 외에도 힘들기 짝이 없는 서민들의 생활에 대한 묘사도 자주 등장합니다. 내용이 이렇게 닮게 된 이유는 이 탈춤들의 기원과 관계됩니다. 이런 탈춤을 처음으로 추던 사람들은 원래 궁중에 있던 광대들이었습니다. 조선에는 궁중에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 같은 재인 혹은 광대들 집합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궁중에 큰 행사가 열렸을 때 흥을 돋우기 위해 공연을 하는 패거리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알고 싶으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왕의 남자”라는 영화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영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게 전부가 사실인 것은 아니지만 궁실의 큰 행사에 이런 공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관청이 조선 중기에 해체됩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추측하건대 조선 조정에 유교적 색채가 강해지면서 성리학적 이념에 맞지 않는 것들을 없애버린 결과일 것입니다. 그 결과 이 관청에 속해 있던 광대들은 먹고 살기 위해 민간으로 흘러 들어가 연예 활동을 계속 했고 이런 과정에서 탈춤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탈춤은 전국으로 퍼져갔고 그로 말미암아 각 지방의 탈춤들은 비슷한 구조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들어보면, 탈춤에는 사자가 많이 나옵니다. 함경남도의 유명한 탈놀이인 ‘북청 사자놀음’은 아예 사자가 주인공이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에는 없는 동물인 사자가 어떻게 민간 놀이에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것 역시 탈놀이가 궁중에서 도래했다는 것을 증명해줍니다. 조선 궁중에서 행해지던 놀이는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는데 중국 원래의 극에 등장하고 있던 사자가 여러 단계를 걸쳐서 조선의 민간 연희까지 전달된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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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에 궁중 광대를 관리하던 곳이 해체되면서, 광대들은 궁중이 아닌 민간에서 공연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Photoren at ko.wikipedia.org> | |
신분제도의 억압 속에 유일하게 허용된 풍자극

탈춤은 왜 추었던 것일까요? 먼저 하회 탈춤부터 볼까요? 이 탈춤은 마을 축제를 할 때 추던 춤인데 그 목적은 신분 갈등에서 생기는 문제를 풀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탈춤의 대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양반 과장을 보면 양반은 종으로부터 사정없이 모욕을 당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한 선비가 양반에게 자기는 ‘사서육경 정도가 아니라 팔서육경까지 안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러자 바보로 묘사되는 양반은 자기가 모르는 것이 나오니까 무식함이 탄로 날까 태연한 척 하고 ‘그게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초랭이가 ‘팔만대장경, 봉사 안경, 처녀 월경, 머슴 새경 등’이라고 말합니다. 양반을 완전 능멸하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탈춤에서 양반은 완전 바보로 그려집니다. 조선 같은 신분제 사회에서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렇게 양반을 마음대로 비웃을 수 있는 것은 탈춤 추는 날 하루뿐입니다. 상민이나 천민들을 이날 하루만 풀어준 겁니다. 양반들이 이들을 일 년 내내 억압하다 이 날 하루만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준 겁니다. 억압적인 계층 구조 속에서 이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 언제 어디서 분출될지 모르는 일이니, 그리 되기 전에 양반계층에서 미리 손을 쓴 것일 겁니다. | |
큰 장이 서던 곳에는 빼놓을 수 없는 탈춤

이에 비해 시장에서 많이 연행되는 탈춤은 그 동기가 좀 다릅니다. 이런 유의 탈춤들은 모두 큰 장이 서던 곳에서 유래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서울의 요충지로 되어 있는 송파에 유명한 탈춤산대놀이패가 있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사실 송파 산대는 무형문화재로도 등록되어 있을 정도로 유명한 탈춤입니다. 이 송파는 아주 중요한 나루터가 있었던 곳입니다. | |

지배 계층을 공공연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탈춤은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웃음과 해학의 이름으 로 유일하게 허용된 민중의 출구 역할을 했다. 사진은 하회탈춤 중 이매의 모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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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잠실 쪽 한강 둔치에 가면 송파나루터 표지석이 있습니다.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로 들어오기 위해 배를 타는 나루터가 송파였기 때문에 이곳에는 상인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매일 상거래가 있었다고 하니 아주 활발했던 시장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런 곳에서 탈춤을 춘 것일까요? 그것은 볼거리를 제공해서 고객들을 더 끌어들이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을 겁니다. 요즘도 큰 장이 서거나 행사가 있으면 연예인들을 초청하지요? 그래야 사람들이 연예인 보러 오는 맛에 행사장에 오게 되고 그 덕에 행사가 북적거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연구를 보니 황해도 사리원에 한번 장이 서고 봉산 탈춤이 연행되면 많을 때는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몰려들었다고 하더군요. 공연비용은 상인들이 대는데 이 정도 되면 본전을 뽑고도 남았을 겁니다. 이렇게 재정 지원이 있으니 탈춤의 완성도는 더욱더 높아갑니다. 춤도 더 세련되고 다양해지며 의상도 더 화려해집니다. 그리고 악사들의 기량도 늘어 다양한 장단들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봉산 탈춤 같은 명품이 나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 |
수많은 재담과 연극적인 요소가 어우러진 최고의 민중예술

이와 같이 탈춤은 한 마디로 말해 민중종합예술이라 할 수 있는데 판소리와 더불어 조선 말의 민중문화를 대표하는 장르입니다. 민중예술의 온갖 장르가 모인 종합예술세트라는 것입니다. 탈춤에는 실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양반의 종이지만 주인공인 말뚝이부터 승려, 일반 서민인 신발장사, 무당, 떠돌이 한량, 문둥이, 백정, 무동, 심지어는 원숭이, 사자 등 아주 다양한 계층과 부류의 사람(그리고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이 나와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이야기하지요. 자신들이 속한 계층의 문화를 있는 그대로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탈춤은 여기에 음악과 춤이 가미되고 수많은 재담과 연극적인 요소 등이 어우러져 최고의 민중예술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탈춤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이런 탈춤을 보고 싶은 분들은 송파에 있는 서울놀이마당에서 연행되는 공연을 보아도 되고 혹시 하회 마을에 갈 기회가 있으면 하회 탈춤도 볼 수 있습니다. 탈춤은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좋은 촉매제가 될 것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