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피서지, 개성 성거산 태종대

그림 오른쪽 위에 ‘태종대(太宗臺)’라고 적혀 있다. 태종대는 개성(송도) 북쪽 성거산(聖居山)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로 조선 태종이 이곳에 놀러 온 후 그 이름을 따서 태종대가 되었다고 한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는 넓적한 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가 종이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맞은편 바위에는 웃옷을 벗고 있는 사람, 바지만 걷어 올린 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 이들을 서서 지켜보는 시종들이 보인다.
여름날 계곡 물놀이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송도기행첩]으로 불리어지는 화첩에 포함되어 있다. 이 화첩에는 개성 지역의 명승지를 그린 16개의 그림과 3건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화첩 겉표지에 서예가 김태석(金台錫, 1875-1953)이 쓴 ‘표암선생유적(豹菴先生遺蹟)’ 표지가 붙어 있지만 이 화첩은 현재 ‘송도기행첩’으로 불린다. 표지 중 ‘표암’은 18세기 대표적인 사대부 문인화가이자 서예가, 평론가인 강세황의 호이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일컬어지는 그의 문화예술적 역량은 경기도 안산에서 꽃피웠다. 1744년 32세부터 영릉참봉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는 1773년 61세까지 30년을 안산에서 살면서 ‘안산 15학사’의 일원으로 활발한 예술 활동을 펼쳤다. 안산은 청나라로 향하는 뱃길이 항상 열려 있어서 청에서 새로 찍어낸 책과 화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곳으로 강세황은 이곳에서 새로운 문화 자극을 수용했다.
새로운 회화기법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강세황 스스로가 “세상 사람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것(此帖世人不曾一日擊)”으로 평한 이 화첩은 1757년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문집인 [표암유고]에 “박연(박연폭포)에서 놀고 돌아왔다”는 기록은 있으나 시기를 밝히지 않아 송도 방문 시기를 확인할 바 없었으나, 안산 15학사 중 한 명이자 그의 각별한 친구 허필(許佖, 1709-1768)이 그린 [묘길상도]에 적혀 있는 글에서 강세황이 45세가 되던 1757년 7월(음력)에 개성 여행을 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화첩의 화풍은 강세황의 40대 화풍과 상통하기 때문에 이 화첩을 1757년 송도 여행의 결과물로 추정한다. 그림 속의 녹음이 우거지고 개울에는 물이 가득하고 인물들은 웃옷을 벗고 탁족을 하는 풍경 또한 음력 7월에 어울린다. |